말로 전해들은 사적인 이야기를 문자화 할때는 언제나 약간 조심스러워진다.
하지만 잊기엔 아까운 기억들이라서 적어본다.
40분정도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가벼운 등산끝에 모종의 건물로 안내되었다.
1층의 흙이 깔리고 나무펜스가 둘러싼 베란다 같은 공간에서, 북한 말투를 쓰는 키가 작고 젊은 남성이 이곳이 황해도 자신의 집의 뒷뜰이라며 소개한다. 연극적인 임무를 맡았지만 그 연극이 못내 쑥쓰러운듯이 허공을 가리키며 가축들을 소개한다. 일주일에 한번정도 젖을 짜 먹을수 있는 귀한 염소, 배설물을 끓인것을 사료로 먹고 자라고 있는 돼지들, 그리고 쇠사슬로 묶인 장에 12마리정도 있다는 토끼들은 '외화벌이' 용으로 학교에서 토끼가죽을 내라고 할때 죽여서 고기는 먹고 가죽은 제출하는 용도라고 소개한다.
겨울에는 뒷마당이 추워서 토끼들이 태어나자마자 죽기도 하는데 그러면 통채로 튀겨 먹으면 맛있다고. 저 멀리는 광활한 담배밭이 있고, 양귀비를 20대정도 키우고 있다고 했다. 양귀비는 꽃이 피면 진액을 칼로 긁어서 베에 긁은것을 말리면 검게 되는데, 이것을 천식걸리신 어머니가 발작할때 끓여서 수액으로 만들어 주사하면 금세 진정된다고 한다. 약이 다양하고 넉넉치 않기때문에 온 마을 사람들이 양귀비를 재배해 두통이나 배아플때 등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들판에는 때로는 쥐들이 곡식 낱알을 저장해놓은 곳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보물찾기와 같다. 쥐까지 발견하면 더 좋다. 요리를 해 먹을수 있으니까. 그러나 집 천정에 사는 쥐는 마르고 더러워 먹지 않는다. 찍찍 소리가 들리면 아버지가 화살 같은 꼬챙이를 천정에 찌르는데, 붉은 피가 꼬챙이를 따라 주륵 흘러내리면 성공한 것이다. 아버지는 쥐를 잘 잡으시곤 했다. 담배밭 오른쪽에는 3-400m정도 너비의 호수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일년에 한두번 총살형 등 공개처형 단체관람이 이루어진다.
계단을 올라가자 두번째 방에는 어떤 젊은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고 바닥에는 지푸라기, 벽에는 연습장들이 도배되어있었다. 그 집은 초가집이었고 도배지는 비싸기 때문에 사용한 시험지로 도배를 했고, 빵점을 받곤 했던 동생은 부끄러워서 0 에 꽃잎을 붙여놓곤 했다. 어머니는 늘 자라나야할 나이에 가난때문에 밥도 죽도 넉넉히 주지 못함을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물그릇에는 늘 꽃잎을 따서 넣어주셨는데 그것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표현해 주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시고 형편이 넉넉치 않은 와중에 늘 자식들을 먼저 위해주셨는데, 너무 감사한 마음에 어머니 생신날 밥상을 차려드리고 1000원짜리 바지를 사드리자 감격하셨다.
바로 집 앞에는 배나무가 한그루 있었는데 봄에는 배꽃에 아름답지만 가을에는 배가 열려서 괴로운데, 앞에두고 보이는데 먹을수가 없으니 그 고통이 커서 어느날 하루는 경비원들이 보지않을때 배를 몇개 따서 도망을 갔다. 도망을 가다가 앞에 물이 흐르는 도랑을 만나서 포기했고 잡히고 말았다. 경비에게 이름과 주로, 부모님 이름을 알려주고 왔는데 다음날 학교에 가니 난리가 나 있었다. 1000명가량의 학생들 앞에서 '상호비판'을 하는 처벌이 내려졌는데 이는 자아비판을 넘어서 1000명이 넘은 학생들에게 국가의 재산을 도적질하다니 인품이 좋지 못하다, 부모에게서 교육을 잘못 받았다 등등 동료학생들에게서 쏟아지는 비판을 듣는 형벌이었고 부모를 욕되게 했다는 생각에 너무 괴로웠다. 그 이후에 비판문을 3장 써오라는 벌을 받으며 "내가 배를 딴 일이 정말 잘못했구나" 가 아니고 "도랑앞에서 포기하지않고 도망갔더라면 지금 이꼴을 당하지 않았을텐데" 라는 생각에. 이 일 이후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3층에 있던 마지막 방은 비교적 깨끗하게 장판과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고 푸른 숲을 향한 창문이 있었다. 아나운서이신 아버지를 가진 중산층 집안에서 자란 여성분은 본인 역시 동종업계에서 10년정도 일을 했고 큰언니는 글쓰는일, 둘째언니는 성악을 하셨다. 가족들의 장난스러운 대화들을 녹음해서 듣곤했던 녹음기에 대한 추억. 전기를 쓸 수 없기때문에 식용유나 디젤유에 심지를 넣어 만든 호롱불에 의지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진 않았다. 거리 풍경은 통행이 없고 몇대 없는 차, 거의 없는 가로등, 불꺼진 공원, 적막하다. 저녁을 먹으면 불꺼진 방에서 이불을 깔고 자매끼리 도란도란 얘기를 하다가 얘깃거리도 바닥나면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윗집 아랫집에서 벽 너머로 "제청이요!" 하고 요청해오면 앵콜도 하고, 윗집 아랫집 서로서로 노래를 권하고 부르다가 잠들곤 했던 추억을 이야기했다. 가끔 통일이 되면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없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북에서의 아파트는 공동체와 같아서 층간소음으로 싸운다거나 하는 일을 상상도 할수 없다고 한다. 국경에 있었기 때문에 가끔씩 중국쪽 채널에서 중국티비 전파가 잡히면 남녀간의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을 다룬 드라마 같은것을 보곤했는데 북한에는 남녀간의 로맨스를 다룬 티비가 없어서 커텐을 치고 몰래 보곤 했다고 한다.